기획: 장서영
협력 기획/전시 서문: 구나연
그래픽 디자인: 정사록
사진 촬영: 이지양
영상 기기: 올미디어
후원: 서울문화재단
Curated by Seo Young Chang
Co-curation & Exhibition Text by Gu Nayeon
Graphic Design by Jeong Sarok
Photography by Lee Jeeyang
Video Equipment by All Media
Supported by Seoul Foundation for Arts and 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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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노 그립
구나연
폴 비릴리오는 『소멸의 미학』에서 미국의 영화 제작자이자 투자가인 하워드 휴즈(Howard Hughes)의 말년의 은둔에 대해 언급한다. 권력과 부유를 쥔 자본주의의 영웅 휴즈는 말년, 어두운 방의 완전한 은둔 속에서, 욕창으로 뒤덮여, 앙상한 상태로 누워 살았는데, 비릴리오는 그가 거주(inhabit)한 것이 아니라, "어디에나 있으면서 동시에 어디에도 없기(be everywhere and nowhere)를 원하는 아무도 아닌 자"였다고 말한다. 이런 '편재적 부재'는 기술 매체 사용을 통해 충족되었다. 즉 휴즈가 젊은 시절 제작한 초고속 비행기 록히드-사이클론(Lockheed-Cyclone)기나, 일주한 세계의 기록과는 완전히 대조적으로, 움직임에 대한 그의 욕망은 결국 부동성(inertia)에 대한 욕망이었고, 그는 세상과의 유일한 연결고리인 전화기만을 들고 좁은 공간 속에 자신을 가두었다.[1] 오늘의 우리 모두는 열렬히, 이런 하워드 휴즈의 말년이 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우리는 초고속으로 이 세상 어디든 간다. 바로 지금, 누워서, 빠르게. 당도하는 모든 곳은 우주의 끝일 수도, 나의 발 아래일 수도 있다. 수 갈래로 쪼개지는 리얼타임의 틈새에 가만히 누워, 무수히 분열되는 공간들을 액정 너머로 바라본다. 이때 육체의 모든 감각은 시각으로 응집되고, 외부의 존재는 원격으로 재현된다. 이렇게 질주경(dromoscopie)이 된 세계의 이미지는 "자동차 운전수의 시각적 환영이 도로변만이 아닌 전 세계의 재현을 엄습"하는[2] 형태로 변화한다.
장서영은 이러한 재현의 엄습 속에서 급격히 축소되고 있는 감각, 행위, 운동에 관심을 갖는다. 그는 이에 대해 "신체와 세계 사이를 매개하는 인터페이스는 점점 더 납작하고 매끈해진다"고 말한다. 그것은 촉각을 대체하면서, 우리의 모든 '쥠(grip)'을 상실시켜 나간다. 장서영 개인전 《ALL NO GRIP》은 오늘을 장악한 자동 제어 시스템 안에서, 접촉과 마찰이 사라진 수동적 개인의 존재와 그 앞에 재현되는 세계의 양상을 드러낸다. 이를 위해 그는 '속도'와 '주행'을 수행하는 이동의 조건들을 전거로 제시한다. 그것은 자동차이다. 오늘의 기술 환경에서, 이곳로부터 저곳, 그리고 그 관계를 잇는 우리의 행위가 급속도로 기화되어 이동의 모든 도정(trajectivite)이 박탈된 상실은 비장소의 폭증과 자발적 구속으로 심화된다. 자율 주행을 통한 경로와 주행은 그곳이 내가 가고자 한 곳인지, 자동차가 가고자 한 곳인지조차 모호하게 만든다. 선택에 기반한 우리의 동적 개입은 무의미해지고, 기계에 의탁한 자발적 속박이 삶에 대한 새로운 보편으로 자리잡는다.
전시와 동명의 단채널 영상 작업 <All No Grip>에는 요란하게 질주하는 RC카들과 스마트폰을 들고 밀랍처럼 누워있는 한 인물이 있다. 차에 부착된 카메라의 영상은 모니터와 스크린에 미러링 되면서 무한의 이미지를 생성하고, 그 한 켠에서 인물은 이렇게 되뇐다. "마치 낡은 수레가 끈에 묶여서 겨우 움직이는 것처럼, 나의 몸도 끈에 묶여서 겨우 살아간다고 여겨진다." 노화된 신체에 대한 석가의 유훈인 이 말에서, 낡은 수레는 바닥에 혼재하는 검은 전선에 묶인 듯 미동 없이 액정 화면에만 시선을 고정한 인물에 다름 아니다. 마치 하워드 휴즈 같이, 그는 오직 전화기 한대로 '편재적 부재'를 재촉하며, 너무 빨리 닳아버린 수레가 된다. 그처럼, 우리도 이제 승객을 넘어 시청자가 된다. 움직일 수 있으나 움직이지 않으며, 눈동자의 각막을 카메라의 렌즈에 위탁한 채, 이미지의 속도와 속도의 이미지가 교차하는 끝없는 듀레이션 안에서 무심히 호흡한다. 그리고 들리는 질문. "아직도 네가 조종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이에 대한 답변은 5단 변신 침대를 모티브로 한 <평활근(Smooth Muscle)>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스틸 파이프로 된 이 구조물은 <All No Grip>에서 인물을 조금 뒤척이도록 제안하는 5단 변신 침대, 5단 변신 자동차 광고의 문구와 똑같이, 낡은 수레가 된 우리를 쥐고 끌며 움직임을 설계한다. 작품의 제목인 '평활근'은 내장의 근육을 일컫는 말로, 표면이 매끈하며 의지가 아닌 자율신경과 호르몬에 의해 자동 조절되는 근육이다. 5단 변신의 이 철제 튜브는 신체 바깥에 장착된 자율신경망과 유사하게, 의지와 상관없이 조절되고 통제되는 인간의 새로운 근육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파편화되어 기괴하고, 부서져 고장난 것처럼 보인다. 누구나 손으로 잡기 좋은 굵기의 파이프로 이루어졌지만, 그립의 감각이 소멸된 이들을 위해 설계된 것이므로, 그것을 잡을 수 있는 이는 없다. 거기에 누울 사람들은 바로 우리일까?
그렇다면 우리는 이 새로운 평활근 위에 장착된 채, 달리는 것처럼 보이는 주행의 시뮬레이션 영상을 바라본다. 단채널 영상 <Still Moving>은 미려한 차체의 외피에 흐르는 주행의 공간과 사람 따위 필요치 않은 자율 드라이빙의 장면으로 이루어진다. 모든 것이 너무나 부드럽고 매끈한 질주의 분위기 안에서, 정작 그 차는 멈춰 있다. 거기, 달리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것은 질주라는 허상의 구조로서, 질주를 흉내내기 위해 멈춰야 한다. 모든 현실이 액정 화면에 발광하는 시스템으로 소급되고, 모든 체험이 그러한 시스템에 표상되기 위해서, 이를 보는 우리는 가만히 누워 있어야 하고, 속도는 질주의 이미지로 대체되어야 한다. 이 과정은 음험하리만치 조용히 진행되지만, 전시 공간에 가득 요란하게 울려퍼지는 RC카 모터의 소음과 질주를 중계하는 우렁찬 목소리 속에 존재한다. "이 듀레이션을 견디세요!"
이 외침을 뒤로한 채, <Shift Pattern>의 20단 기어 앞에 선다. 이는 온전히 내가 주도하는 질주를 위해 극한의 변속을 제안한다. 미로처럼 복잡하게 구축된 20단의 기어는 도로의 상태에 따라 주행의 색과 질을 결정하는 통로들이다. 이 기어는 스무 개의 각기 다른 그립으로 이루어진 스틱의 방향을 갖는다. 클러치를 밟아 기어가 바뀔 때마다 엔진은 하이 듀레이션(high duration)과 로우 듀레이션(low duration)을 오가며 운전자와 함께 운동한다. 이야말로, 내가 끄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수레, 내 손에 '쥐어진' 끈이다. 내가 통제 가능한 기계, 내가 조절하는 속도는 의지와 상관없이 자동제어 된 오늘의 세계라는 주행 시스템의 바깥에서 행동하는 인간을 요청한다. 내 손의 그립으로 질주하는 차창으로, 끝없이 풍경은 역동하며 마주 불어오는 세찬 바람은 얼굴에 부딪힐 것이다. 이때 신체의 모든 감각은 질주에 몰입한다.
[1] Paul Virilio, The Aesthetics of Disappearance, Semiotext(e), 1991, 24-25.
[2] 폴 비릴리오, 『시각 저 끝 너머의 예술』, 이정하 옴김, 열화당, 2008, 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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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장서영
협력 기획/전시 서문: 구나연
그래픽 디자인: 정사록
사진 촬영: 이지양
영상 기기: 올미디어
후원: 서울문화재단
Curated by Seo Young Chang
Co-curation & Exhibition Text by Gu Nayeon
Graphic Design by Jeong Sarok
Photography by Lee Jeeyang
Video Equipment by All Media
Supported by Seoul Foundation for Arts and 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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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노 그립
구나연
폴 비릴리오는 『소멸의 미학』에서 미국의 영화 제작자이자 투자가인 하워드 휴즈(Howard Hughes)의 말년의 은둔에 대해 언급한다. 권력과 부유를 쥔 자본주의의 영웅 휴즈는 말년, 어두운 방의 완전한 은둔 속에서, 욕창으로 뒤덮여, 앙상한 상태로 누워 살았는데, 비릴리오는 그가 거주(inhabit)한 것이 아니라, "어디에나 있으면서 동시에 어디에도 없기(be everywhere and nowhere)를 원하는 아무도 아닌 자"였다고 말한다. 이런 '편재적 부재'는 기술 매체 사용을 통해 충족되었다. 즉 휴즈가 젊은 시절 제작한 초고속 비행기 록히드-사이클론(Lockheed-Cyclone)기나, 일주한 세계의 기록과는 완전히 대조적으로, 움직임에 대한 그의 욕망은 결국 부동성(inertia)에 대한 욕망이었고, 그는 세상과의 유일한 연결고리인 전화기만을 들고 좁은 공간 속에 자신을 가두었다.[1] 오늘의 우리 모두는 열렬히, 이런 하워드 휴즈의 말년이 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우리는 초고속으로 이 세상 어디든 간다. 바로 지금, 누워서, 빠르게. 당도하는 모든 곳은 우주의 끝일 수도, 나의 발 아래일 수도 있다. 수 갈래로 쪼개지는 리얼타임의 틈새에 가만히 누워, 무수히 분열되는 공간들을 액정 너머로 바라본다. 이때 육체의 모든 감각은 시각으로 응집되고, 외부의 존재는 원격으로 재현된다. 이렇게 질주경(dromoscopie)이 된 세계의 이미지는 "자동차 운전수의 시각적 환영이 도로변만이 아닌 전 세계의 재현을 엄습"하는[2] 형태로 변화한다.
장서영은 이러한 재현의 엄습 속에서 급격히 축소되고 있는 감각, 행위, 운동에 관심을 갖는다. 그는 이에 대해 "신체와 세계 사이를 매개하는 인터페이스는 점점 더 납작하고 매끈해진다"고 말한다. 그것은 촉각을 대체하면서, 우리의 모든 '쥠(grip)'을 상실시켜 나간다. 장서영 개인전 《ALL NO GRIP》은 오늘을 장악한 자동 제어 시스템 안에서, 접촉과 마찰이 사라진 수동적 개인의 존재와 그 앞에 재현되는 세계의 양상을 드러낸다. 이를 위해 그는 '속도'와 '주행'을 수행하는 이동의 조건들을 전거로 제시한다. 그것은 자동차이다. 오늘의 기술 환경에서, 이곳로부터 저곳, 그리고 그 관계를 잇는 우리의 행위가 급속도로 기화되어 이동의 모든 도정(trajectivite)이 박탈된 상실은 비장소의 폭증과 자발적 구속으로 심화된다. 자율 주행을 통한 경로와 주행은 그곳이 내가 가고자 한 곳인지, 자동차가 가고자 한 곳인지조차 모호하게 만든다. 선택에 기반한 우리의 동적 개입은 무의미해지고, 기계에 의탁한 자발적 속박이 삶에 대한 새로운 보편으로 자리잡는다.
전시와 동명의 단채널 영상 작업 <All No Grip>에는 요란하게 질주하는 RC카들과 스마트폰을 들고 밀랍처럼 누워있는 한 인물이 있다. 차에 부착된 카메라의 영상은 모니터와 스크린에 미러링 되면서 무한의 이미지를 생성하고, 그 한 켠에서 인물은 이렇게 되뇐다. "마치 낡은 수레가 끈에 묶여서 겨우 움직이는 것처럼, 나의 몸도 끈에 묶여서 겨우 살아간다고 여겨진다." 노화된 신체에 대한 석가의 유훈인 이 말에서, 낡은 수레는 바닥에 혼재하는 검은 전선에 묶인 듯 미동 없이 액정 화면에만 시선을 고정한 인물에 다름 아니다. 마치 하워드 휴즈 같이, 그는 오직 전화기 한대로 '편재적 부재'를 재촉하며, 너무 빨리 닳아버린 수레가 된다. 그처럼, 우리도 이제 승객을 넘어 시청자가 된다. 움직일 수 있으나 움직이지 않으며, 눈동자의 각막을 카메라의 렌즈에 위탁한 채, 이미지의 속도와 속도의 이미지가 교차하는 끝없는 듀레이션 안에서 무심히 호흡한다. 그리고 들리는 질문. "아직도 네가 조종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이에 대한 답변은 5단 변신 침대를 모티브로 한 <평활근(Smooth Muscle)>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스틸 파이프로 된 이 구조물은 <All No Grip>에서 인물을 조금 뒤척이도록 제안하는 5단 변신 침대, 5단 변신 자동차 광고의 문구와 똑같이, 낡은 수레가 된 우리를 쥐고 끌며 움직임을 설계한다. 작품의 제목인 '평활근'은 내장의 근육을 일컫는 말로, 표면이 매끈하며 의지가 아닌 자율신경과 호르몬에 의해 자동 조절되는 근육이다. 5단 변신의 이 철제 튜브는 신체 바깥에 장착된 자율신경망과 유사하게, 의지와 상관없이 조절되고 통제되는 인간의 새로운 근육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파편화되어 기괴하고, 부서져 고장난 것처럼 보인다. 누구나 손으로 잡기 좋은 굵기의 파이프로 이루어졌지만, 그립의 감각이 소멸된 이들을 위해 설계된 것이므로, 그것을 잡을 수 있는 이는 없다. 거기에 누울 사람들은 바로 우리일까?
그렇다면 우리는 이 새로운 평활근 위에 장착된 채, 달리는 것처럼 보이는 주행의 시뮬레이션 영상을 바라본다. 단채널 영상 <Still Moving>은 미려한 차체의 외피에 흐르는 주행의 공간과 사람 따위 필요치 않은 자율 드라이빙의 장면으로 이루어진다. 모든 것이 너무나 부드럽고 매끈한 질주의 분위기 안에서, 정작 그 차는 멈춰 있다. 거기, 달리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것은 질주라는 허상의 구조로서, 질주를 흉내내기 위해 멈춰야 한다. 모든 현실이 액정 화면에 발광하는 시스템으로 소급되고, 모든 체험이 그러한 시스템에 표상되기 위해서, 이를 보는 우리는 가만히 누워 있어야 하고, 속도는 질주의 이미지로 대체되어야 한다. 이 과정은 음험하리만치 조용히 진행되지만, 전시 공간에 가득 요란하게 울려퍼지는 RC카 모터의 소음과 질주를 중계하는 우렁찬 목소리 속에 존재한다. "이 듀레이션을 견디세요!"
이 외침을 뒤로한 채, <Shift Pattern>의 20단 기어 앞에 선다. 이는 온전히 내가 주도하는 질주를 위해 극한의 변속을 제안한다. 미로처럼 복잡하게 구축된 20단의 기어는 도로의 상태에 따라 주행의 색과 질을 결정하는 통로들이다. 이 기어는 스무 개의 각기 다른 그립으로 이루어진 스틱의 방향을 갖는다. 클러치를 밟아 기어가 바뀔 때마다 엔진은 하이 듀레이션(high duration)과 로우 듀레이션(low duration)을 오가며 운전자와 함께 운동한다. 이야말로, 내가 끄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수레, 내 손에 '쥐어진' 끈이다. 내가 통제 가능한 기계, 내가 조절하는 속도는 의지와 상관없이 자동제어 된 오늘의 세계라는 주행 시스템의 바깥에서 행동하는 인간을 요청한다. 내 손의 그립으로 질주하는 차창으로, 끝없이 풍경은 역동하며 마주 불어오는 세찬 바람은 얼굴에 부딪힐 것이다. 이때 신체의 모든 감각은 질주에 몰입한다.
[1] Paul Virilio, The Aesthetics of Disappearance, Semiotext(e), 1991, 24-25.
[2] 폴 비릴리오, 『시각 저 끝 너머의 예술』, 이정하 옴김, 열화당, 2008, 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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