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g. 20 – Sep. 20. 2025
Kelvin Kyung Kun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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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근 개인전 <땅이 기억하는>
구나연(미술비평)
박경근의 작업은 복잡해 보이지만, 지극히 "논리적"이다. 나는 그의 작품을 보면 매우 단단하다는 느낌을 받는데, 이는 작품의 동력 안에 감춰진 감각적 논리에서 비롯된다. 박경근 개인전 《땅이 기억하는》은 그 논리의 힘에 관심을 둔다.이 힘은 아마도 두 가지 사이의 긴장이 그의 작업 세계를 지탱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우선 그에게 한국은 추체험의 대상이며 그는 늘 내부인이자 외부인이다. 영화관에서는 두 시간 가량의 영화를 상영하며 미술관에서는 움직이는 미디어 설치와 시간 기반 이미지를 구축하기 때문에, 일원화된 경전은 없다. 이 특수한 정서적 장치는 개념적 도열이나 균형의 감각보다는, 둘 사이의 논쟁적인 틈, 균열, 비대칭과 같이 관습적 해법에서 벗어난 논리를 비축한다. 그러므로 그의 작업은 손쉽게 근대성, 산업화, 기술 등의 소재로 수식되기 앞서, 속단할 수 없는 현상들에 대한 날 선 감각의 현시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박경근의 작품에는 공간과 시간이라는 대전제가 있고, 이것은 '현재'라는 것으로 묶인다. 여기서 '현재'란 단순히 시제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모습을 드러낸 존재의 성격, 혹은 이에 대한 무수한 관찰을 담아낸다. 그의 현재는 역사와 기술의 상호작용으로 발생하고 또한 흔적을 남기는 것이다. 그런데 발생과 흔적은 함께 겸할 수 없다. 그럼에도 그의 작업에서 현재는 발생이며 동시에 흔적이다. 이것은 이를테면 '피드백의 피드백'과 같은 것이다. 우리의 현재는 지구의 물리적 환경과 기술 매체 환경의 공존으로 이루어진다. 이 공존은 순차로 이어지지 않고, 끝없이 어긋나며 실재와 환영을 혼합한다. 실재와 환영의 무한한피드백으로 인하여 둘의 구분은 휘발된다. 따라서 실재와 환영은 발생이자 흔적이며, 박경근의 작업에서 박동하는 것은 이러한 역설로 감지된 긴장이다.
이번 전시에서 내가 주목하는 것도 이 같은 사이의 긴장과 현재의 역설이다. 그에게 물리적 공간인 '땅'은 시간과 관계하며 역사가 부여되는 장소이다. 그러나 이는 구체적 사건이나 기록을 넘어 장소에 암묵하는 고유한 의미로 생성된다. 전시와 동명의 영상 작품 <땅이 기억하는>은 공간과 시간의 공모를 통한 역사의 발생과 흔적에 대한 독해이다. 모순된 현재가 산과 물, 땅과 공기라는 중립적 공간에 자리 잡는 방식이며, 그렇게 우리의 삶이 축적한 감정의 지층을 파악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는 안동에 있는 한 마을의 모습에 각인된 현재의 속성, 즉 생성과 흔적이 어지럽게 혼재하는 공간의 속내에 접근한다. 카메라는 풍경의 표층을 뚫고 들어가며 현재를 표상하는 예기치 못한 물체와 실체를 드러낸다. 전통의 알레고리가혼탁한 물의 서사와 뒤섞일 때, 산업 사회의 가쁜 호흡이 장악했던 땅의 기억은 재생된다. 화면에서 겹겹잇따르는 이미지의 투명성, 장면의 역전과 상치, 흑백과 컬러, 네거티브와 고주파의 음향은 팽팽한 긴장의 진폭을 고조시키며 불확실한 현재가 퇴적된 평온한 공간의 외양을 휘젓는다. 이렇게 과거와 지금의 추상화된 관계는 수면 위의 지대와 수장된 잔해를 공유하며 구체적인 물적 관계로 진입한다.
공업화와 산업화와 같은 역사적 과정은 관념이나 정신이 아닌, 물질적 과정을 통해 또박또박 진행된다. 박경근은 영상을 주된 매체로 다루는 작가이고, 그가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 역시 시공간에 대한 물리적 생성과 흔적에 깊이 천착하고 있다. 이것은 두 가지의 구체적인 실체와 맞닿는데, 하나는 시공간의 경험적 실체이고 다른 하나는 시각 매체의 기술적 실체이다. 그러나 이 실체는 끊임없는 의미 작용의 상태에 있으면서도, 그의 말처럼 "결국 하나의 일관된 우주를 이루지 못한 채, 감정의 흔적—불완전한 궤도를 떠도는 그림자들을 남긴다." 더욱이 <피드백의 피드백>에서 구 서울역이라는 역사적 공간에 방문한 사람들을 로봇의 시선이 포착한 장면은 역설적 현재를 거듭 갱신하는 기술과 인간의 새로운 축도로 다가온다. 그의 작업에서 물리적 공간과 대상을 향한 기계의 행위는 기계의 시선으로 번역되고, 이것은 우리가 세상을 보고 살아가는 방식으로 내면화된다.
공간의 역사라고 부르는 것은 현재의 복잡한 역설 속에서 겨우 찾아낸 한없이 비좁은 통로이다. 하지만 박경근의 작업에서 역사는 경험과 매체의 실체가 교차되는 '현재'의 표면과 같다. 그 표면은 말하자면 암각화 같은 것이다. 박경근은 과거 반구대 암각화를 보았던 일을 회고하며, 거기에 새겨진 고래를 보며 그곳과 멀지 않은 조선소에서 건조되던 거대한 배들의 모습을 상기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구불거리는 고래의 형상과 당시 같은 도시에서 건조되고 있는 거대한 배들의 유사성을 보았다. ... 암각화를 새긴 이들은 이전 시대 선조들의 경험을 이미지로 기록하기 위해, 혹은 그 시대의 죽음을 선포하기 위해, 그들의 선조들이 겪었던 공포로부터 시간적 혹은 정신적 단절이 필요했다. 아마도 그 이미지는 부족의 공동체의식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선사시대 사람들이 모닥불 주위에 모여 북소리에 맞춰 춤추고, 그들의 흔들리는 그림자가 고래와 동물 암각화 위에 비치며, 예술의 기원을 추동하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나 역시 아주 오래전 반구대 암각화를 본 적이 있다. 반구대 암각화에 대한 관심이 미미한 1990년대 말엽이었기 때문에, 겨울의 심한 가뭄 덕에 고작 무릎만큼만 차오른 물살을 건너 암각화 앞에 갈 수 있었다. 축축한 흙에 서서 바위에 새겨진 고래, 그 고래 위의 고래, 사람, 또 그 사람을 따르는 사람 등 무수한 형상의 요철을 손으로 만졌을 때의 촉각이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것은 아마 어떤 항구성, 수만 년을 가로질러 여전히, 강력히 포진하는 생의 원초성에 대한 확연한 감각이었을 것이다. 인간의 욕망과 의식은 선사 시대에서 지금까지, 삶의 공포, 집단의 역사, 포획과 축재(築財)를 반복하고 있다. 또한 기술은 인간의 이러한 욕망과 의식을 결정한다. 도구의 생산은 인간이 기계를 이용한 결과가 아니라, 기계에 의해 변화하는 인간의 의식과 행위를 의미한다. 박경근은 카메라라는 도구, 즉 기계의 시선으로, 끝없이 과거로 전도되는 우리의 현재를 본다. 그렇게 그가 땅에 잠재된 기억을 응시하는 일은, 단단한 현재의 표면에 어른거리는 북소리이자 그림자가 되고, 때로 예술이란 감각으로 되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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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drive.google.com/file/d/1lyh7Tea5YLoh8qhexN0CujZtLa8nTjbi/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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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근 개인전 <땅이 기억하는>
구나연(미술비평)
박경근의 작업은 복잡해 보이지만, 지극히 "논리적"이다. 나는 그의 작품을 보면 매우 단단하다는 느낌을 받는데, 이는 작품의 동력 안에 감춰진 감각적 논리에서 비롯된다. 박경근 개인전 《땅이 기억하는》은 그 논리의 힘에 관심을 둔다.이 힘은 아마도 두 가지 사이의 긴장이 그의 작업 세계를 지탱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우선 그에게 한국은 추체험의 대상이며 그는 늘 내부인이자 외부인이다. 영화관에서는 두 시간 가량의 영화를 상영하며 미술관에서는 움직이는 미디어 설치와 시간 기반 이미지를 구축하기 때문에, 일원화된 경전은 없다. 이 특수한 정서적 장치는 개념적 도열이나 균형의 감각보다는, 둘 사이의 논쟁적인 틈, 균열, 비대칭과 같이 관습적 해법에서 벗어난 논리를 비축한다. 그러므로 그의 작업은 손쉽게 근대성, 산업화, 기술 등의 소재로 수식되기 앞서, 속단할 수 없는 현상들에 대한 날 선 감각의 현시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박경근의 작품에는 공간과 시간이라는 대전제가 있고, 이것은 '현재'라는 것으로 묶인다. 여기서 '현재'란 단순히 시제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모습을 드러낸 존재의 성격, 혹은 이에 대한 무수한 관찰을 담아낸다. 그의 현재는 역사와 기술의 상호작용으로 발생하고 또한 흔적을 남기는 것이다. 그런데 발생과 흔적은 함께 겸할 수 없다. 그럼에도 그의 작업에서 현재는 발생이며 동시에 흔적이다. 이것은 이를테면 '피드백의 피드백'과 같은 것이다. 우리의 현재는 지구의 물리적 환경과 기술 매체 환경의 공존으로 이루어진다. 이 공존은 순차로 이어지지 않고, 끝없이 어긋나며 실재와 환영을 혼합한다. 실재와 환영의 무한한피드백으로 인하여 둘의 구분은 휘발된다. 따라서 실재와 환영은 발생이자 흔적이며, 박경근의 작업에서 박동하는 것은 이러한 역설로 감지된 긴장이다.
이번 전시에서 내가 주목하는 것도 이 같은 사이의 긴장과 현재의 역설이다. 그에게 물리적 공간인 '땅'은 시간과 관계하며 역사가 부여되는 장소이다. 그러나 이는 구체적 사건이나 기록을 넘어 장소에 암묵하는 고유한 의미로 생성된다. 전시와 동명의 영상 작품 <땅이 기억하는>은 공간과 시간의 공모를 통한 역사의 발생과 흔적에 대한 독해이다. 모순된 현재가 산과 물, 땅과 공기라는 중립적 공간에 자리 잡는 방식이며, 그렇게 우리의 삶이 축적한 감정의 지층을 파악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는 안동에 있는 한 마을의 모습에 각인된 현재의 속성, 즉 생성과 흔적이 어지럽게 혼재하는 공간의 속내에 접근한다. 카메라는 풍경의 표층을 뚫고 들어가며 현재를 표상하는 예기치 못한 물체와 실체를 드러낸다. 전통의 알레고리가혼탁한 물의 서사와 뒤섞일 때, 산업 사회의 가쁜 호흡이 장악했던 땅의 기억은 재생된다. 화면에서 겹겹잇따르는 이미지의 투명성, 장면의 역전과 상치, 흑백과 컬러, 네거티브와 고주파의 음향은 팽팽한 긴장의 진폭을 고조시키며 불확실한 현재가 퇴적된 평온한 공간의 외양을 휘젓는다. 이렇게 과거와 지금의 추상화된 관계는 수면 위의 지대와 수장된 잔해를 공유하며 구체적인 물적 관계로 진입한다.
공업화와 산업화와 같은 역사적 과정은 관념이나 정신이 아닌, 물질적 과정을 통해 또박또박 진행된다. 박경근은 영상을 주된 매체로 다루는 작가이고, 그가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 역시 시공간에 대한 물리적 생성과 흔적에 깊이 천착하고 있다. 이것은 두 가지의 구체적인 실체와 맞닿는데, 하나는 시공간의 경험적 실체이고 다른 하나는 시각 매체의 기술적 실체이다. 그러나 이 실체는 끊임없는 의미 작용의 상태에 있으면서도, 그의 말처럼 "결국 하나의 일관된 우주를 이루지 못한 채, 감정의 흔적—불완전한 궤도를 떠도는 그림자들을 남긴다." 더욱이 <피드백의 피드백>에서 구 서울역이라는 역사적 공간에 방문한 사람들을 로봇의 시선이 포착한 장면은 역설적 현재를 거듭 갱신하는 기술과 인간의 새로운 축도로 다가온다. 그의 작업에서 물리적 공간과 대상을 향한 기계의 행위는 기계의 시선으로 번역되고, 이것은 우리가 세상을 보고 살아가는 방식으로 내면화된다.
공간의 역사라고 부르는 것은 현재의 복잡한 역설 속에서 겨우 찾아낸 한없이 비좁은 통로이다. 하지만 박경근의 작업에서 역사는 경험과 매체의 실체가 교차되는 '현재'의 표면과 같다. 그 표면은 말하자면 암각화 같은 것이다. 박경근은 과거 반구대 암각화를 보았던 일을 회고하며, 거기에 새겨진 고래를 보며 그곳과 멀지 않은 조선소에서 건조되던 거대한 배들의 모습을 상기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구불거리는 고래의 형상과 당시 같은 도시에서 건조되고 있는 거대한 배들의 유사성을 보았다. ... 암각화를 새긴 이들은 이전 시대 선조들의 경험을 이미지로 기록하기 위해, 혹은 그 시대의 죽음을 선포하기 위해, 그들의 선조들이 겪었던 공포로부터 시간적 혹은 정신적 단절이 필요했다. 아마도 그 이미지는 부족의 공동체의식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선사시대 사람들이 모닥불 주위에 모여 북소리에 맞춰 춤추고, 그들의 흔들리는 그림자가 고래와 동물 암각화 위에 비치며, 예술의 기원을 추동하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나 역시 아주 오래전 반구대 암각화를 본 적이 있다. 반구대 암각화에 대한 관심이 미미한 1990년대 말엽이었기 때문에, 겨울의 심한 가뭄 덕에 고작 무릎만큼만 차오른 물살을 건너 암각화 앞에 갈 수 있었다. 축축한 흙에 서서 바위에 새겨진 고래, 그 고래 위의 고래, 사람, 또 그 사람을 따르는 사람 등 무수한 형상의 요철을 손으로 만졌을 때의 촉각이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것은 아마 어떤 항구성, 수만 년을 가로질러 여전히, 강력히 포진하는 생의 원초성에 대한 확연한 감각이었을 것이다. 인간의 욕망과 의식은 선사 시대에서 지금까지, 삶의 공포, 집단의 역사, 포획과 축재(築財)를 반복하고 있다. 또한 기술은 인간의 이러한 욕망과 의식을 결정한다. 도구의 생산은 인간이 기계를 이용한 결과가 아니라, 기계에 의해 변화하는 인간의 의식과 행위를 의미한다. 박경근은 카메라라는 도구, 즉 기계의 시선으로, 끝없이 과거로 전도되는 우리의 현재를 본다. 그렇게 그가 땅에 잠재된 기억을 응시하는 일은, 단단한 현재의 표면에 어른거리는 북소리이자 그림자가 되고, 때로 예술이란 감각으로 되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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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drive.google.com/file/d/1lyh7Tea5YLoh8qhexN0CujZtLa8nTjbi/view